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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김명호:


627일 안식일

일몰오후 757

 

기억절 :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24:7).

 

연구 범위 : 3:1~6, 22:39~46, 고후 13:8, 22:53, 12:30, 고전 15:14

 

어린 시절부터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계셨다(2:41~50). 그분은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변함없는 충정으로 교육과 치유와 봉사의 사역을 하셨다.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때가 이르러 그분은 홀로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신 뒤에 차례로 배반과 거절, 재판과 십자가 죽음을 겪으셨고 마침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이전에도 십자가의 불가피성을 알고 계셨다. 복음서에는 여러 번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관련하여 당위성을 강조하는 말이 사용되었다(17:25, 22:37, 24:7, 16:21, 8:31, 9:12, 3:14). ‘그는 예루살렘에 가셔야 했다’, ‘그는 고난을 당하셔야 했다’, ‘그는 거절을 당하셔야 했다’, ‘그는 들려져야 했다등이다. 그 무엇도 골고다로 가는 하나님의 아들을 막을 수 없었다. 십자가를 거부하라는 제안은 모두 사탄에게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분은 그 모든 제안을 책망하셨다(16:22~23). 그분은 올라가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살아나야 할 것을”(16:21) 확신하셨다. 예수님께 십자가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1:26)난 비밀의 일부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24:25~26, 46).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학습 목표

깨닫기 : 예수님의 고난과 승리를 이해한다.

느끼기 : 겟세마네의 고뇌와 십자가의 고통, 부활의 승리로 말미암아 변화한다.

행하기 :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한다.

 

A.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큰 승리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십자가로 죄에 대하여 죽고 장사되었고 사단이 죽게 되었다. 죄를 처리했기 때문에 승리이다.(2:15)

십자가를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개인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를 죄를 처리하고 우리를 속죄하는 사건으로 보든지 그렇지 않든지 하는 것이 구원과 멸망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실제 벌어지는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지 이야기해 봅시다.

바울처럼 죄에 대하여 자아에 대하여 날마다 죽는 경험으로 나아가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

 

B.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 주제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부활이 없으면 속죄가 완성되지 않고 생명이 드러나지 않는다.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소망이 없다.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삶과 없는 삶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부활의 소망은 부활의 생명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한다.

부활을 믿는 우리의 소망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면 좋을까요?

우리의 삶의 모습이 죽음을 이긴 생명의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

 

결론 :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진리는 거룩하고 죄 없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사 죽으셨다가 사탄과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다음으로 숭고한 진리는 예수님이 그분을 믿음으로 영접한 모든 사람에게 죄에 대한 승리를 주시고 그분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첫째 날() 겟세마네, 무시무시한 투쟁

621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22:42).

 

역사의 미명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생명과 행복에 필수적인 모든 것이 존재하는 아름답고 복된 동산에 두셨다. 하지만 곧 범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 사탄이 나타난 것이다(3). 그는 젊은 부부를 유혹해서 어린 지구를 하나님과 사탄, 선과 악의 큰 대결 속에 몰아넣었다.

이제 하나님의 시간표 속에서 또 다른 동산이 진리와 거짓, 의와 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인류를 파괴하려는 사탄의 목적이 충돌하는 큰 대결의 장이 되었다(22:39~46).

에덴에서 세상은 죄의 파멸 속에 빠졌다. 그러나 겟세마네에서는 세상의 궁극적인 승리가 보장되었다. 에덴은 하나님을 거역한 자기 확신의 비극적 승리를 보았다. 그러나 겟세마네는 하나님께 대한 자기 굴복과 죄에 대한 승리의 계시를 보았다.

 

1. 에덴에서 일어난 일과 겟세마네에서 일어난 일을 비교해 보라(3:1~6, 22:39~46). 두 동산에서 일어난 사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3:1~6]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22:39~46]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40 그 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41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 에덴동산에서는 첫 아담이 하나님을 떠나서 사망이 되는 사건이 기록되었고, 겟세마네 동산은 마지막 아담이 사단과 싸워서 승리하는 사건이 기록되었다. 이 승리로 사람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기회를 열었다.

 

겟세마네에서는 두 가지 중대한 사실이 두드러진다. 하나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사명과 목적에서 벗어나게 하려던 사탄의 가장 극렬한 유혹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그분의 뜻과 목적을 성취했던 가장 숭고한 모본이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이런 유명한 기도를 남기셨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22:42). 겟세마네는 투쟁이 아무리 맹렬하고 자아가 아무리 연약할지라도 기도의 능력을 경험한 자에게 승리가 보장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탄의 모든 군대가 예수님과 맞서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분이 그토록 사랑하셨던 제자들은 주의 고통에 둔감하였다. 피가 섞인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배신자의 입맞춤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는 달려들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기도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 생애의 큰 짐을 짊어져야 할 영혼에게 절실한 능력을 공급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부가설명> 기록상으로 보면 에덴동산에는 투쟁이 없었다. 여자가 뱀의 말에 아주 쉽게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또 아담도 아내의 말에 쉽게 동의하고 선악과를 먹은 것 같다. 먹지 말라한 과실을 먹지 않으면 되는 단순한 사실을 외면하고 먹으라는 유혹에 간단히 넘어간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겟세마네동산에서는 피땀 흘리는 투쟁이 있다. 첫 아담을 죄로 물들지 않은 환경과 인생을 단숨에 정복한 사단은 죄로 연약하여진 사람들과 같은 체질로 오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을 시험으로 넘어뜨리는데 진땀을 빼고 있었다. 예수께서 피땀을 흘리시는 동안 사단도 진땀을 흘렸으리라고 생각한다. 만일 예수가 십자가를 진다면 실상은 사단 자신이 십작에서 죽게 된다는 것을 루시퍼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능력을 다해서 예수를 넘어뜨리려 했을 것이다. 생명과 사망의 사투이며 하나님과 사단의 사투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승리하셨다. 그분은 자기를 비어 사람이 되어 오신 이유와 목적을 결코 잊지 않으셨다.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께 복종하기로 한 그 언약을 결코 파기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그래서 승리하셨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복종하는 사람도 승리한다.

 

교훈 :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유혹에 패했지만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기도와 전적인 순종의 힘을 통해 사탄의 극렬한 유혹을 물리치셨다.

 

 

둘째 날() 유다

622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22:3).

 

1. 당연히 사탄은 모든 제자를 사로잡기 위해 열심히 일했을 것이다. 다른 제자들과 달리 원수가 유다에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 유다의 마음에 자기 계획이 확고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5천명 먹인 사건을 보면서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으면 그때부터 그는 그런 기회를 노리고 예수를 따라다닌 것으로 보인다. 사단은 이런 가룟유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유다는 거부 없이 스스로 사로잡힌 것이다.

 

누가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기 전에 어떻게 산에서 밤새 기도하셨는지 이야기한다(6:12~16). 예수님은 열두 제자가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선물이라고 믿으셨다(17:6~9). 그렇다면 유다도 정말 그분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는가?

 

2. 우리는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유다의 반역과 배도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목적은 성취될 것이었는가?(고후 13:8 참고)

[고후13:8]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 가룟 유다는 진리를 거슬러 자기 욕심을 따라 갔다. 그러나 결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건이 빨리 제 때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재능이 많았던 유다는 또 다른 바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빠지고 말았다. 그는 겟세마네와 같은 경험을 할 수도 있었으나 그의 선택은 에덴에서의 타락과 비슷했다.

그는 악한 탐욕의 정신을 길러서 마침내 그것이 그의 생애의 동기를 지배하도록 했다. 돈에 대한 애착이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사랑을 능가했다”(시대의 소망, 716).

예수님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9:10~17), 유다는 처음으로 그 기적의 정치적 가치를 간파하고 강제로 그리스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계획을 세웠”(시대의 소망, 719). 그러나 예수님이 그런 시도를 책망하시자 유다의 환멸이 시작되었다. “그의 희망이 몹시 컸기에 그의 실망 역시 그만큼 쓰라렸다”(시대의 소망, 719). 유다는 다른 이들처럼 예수님이 그분의 비범한 능력을 사용하여 세속적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 절대 생기지 않을 일시적인 나라의 지위를 얻고자 했던 그의 욕망이 반드시 일어날 영원한 나라의 지위를 잃게 했다니 얼마나 비극적인가.

예수님을 따르는 한 여인이 비싼 향유를 그분의 발에 부었을 때 유다는 그녀의 행위를 경제적 낭비라고 매도했다(12:1~8). 유다의 눈에는 돈만 보였다. 돈에 대한 사랑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뒤덮었다.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은 유다로 하여금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하늘의 선물에 값을 매기게 하였다(26:15). 그때부터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22:3)갔고 그는 잃어버린 영혼이 되었다.

 

<부가설명> 우리는 기회를 멸망으로 바꾸는 미련한 짓을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가룟유다는 예수께서 지상 이스라엘의 강력한 군왕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예수님을 능력을 발휘해서 로마를 쳐부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려고 계획했던 것 같다. 로 마 군인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할 때에 예수님이 능력으로 그들을 제압하면 당연히 반로마 봉기가 일어날 것이고 로마는 예수님의 능력 앞에 굴복하고 이스라엘을 세계의 왕국이 되고 자기는 그 왕국의 총리대신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만 되면 명예와 재물이 절로 굴러들어올 것이라고 꿈꾸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생각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자기 생각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다. 유다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영생의 기회를 영멸의 기회로 바꾸어버렸다. 정말 비극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교훈 : 열두 제자로 부름을 받은 유다는 훌륭한 사도가 될 수 있었지만 세속 왕국의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영원한 상급을 잃어버렸다.

 

 

셋째 날() 그분의 편 아니면 반대편

623

 

십자가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지만 한편으로 신앙과 불신앙, 수용과 배반, 영생과 사망 사이에서 역사의 큰 분할자 역할을 한다. 십자가에 관련하여 누구에게나 중간 지대는 없다. 우리는 이쪽 편 아니면 저쪽 편이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12:30). 우리에게 다소 거북하게 들릴 수 있는 강한 표현이지만, 예수님은 여기서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의 대쟁투에 개입되어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무엇이 실재이고 그 진리에 수반되어 있는 진실은 무엇인지 표현하신다. 즉 우리는 예수님 편이든지 아니면 사탄 편이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1. 아래의 인물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대했는가? 우리는 그들의 예를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십자가를 이해하는 방식에 도움이 될 만한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는가?

1) 산헤드린(22:53). 그들은 어떤 실수를 범했으며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들이 예수님을 바라봤던 방식과 비슷한 종류의 과오를 피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은 예수가 자신들의 사상을 파괴하고 자기들의 지위를 위협한다고 생각해서 트집을 잡아 거짓증인으로 정죄하고 예수를 사형에 내 주도록 했다.

우리는 자기 위치를 예수님 아래 두어야 한다. 자아를 예수님께 굴복해야 한다.

 

2) 빌라도(23:1~7, 13~25). 무엇이 빌라도로 하여금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19:4)했다고 말하고서 십자가형을 선고하게 했는가? 자신이 알고 있는 의를 실행하는 데 실패한 그의 과오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는가?

군중들의 위협이었다. 군중이 빌리도에게 예수를 왕으로 인정하는 것은 가이사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을 때 굴복했다. 그도 자기 지위를 지키기를 의를 행하는 것보다 앞세웠다. 우리도 같은 허물을 범할 수 있다.

 

3) 헤롯(23:6~12). 그가 저지른 큰 실수는 무엇인가? 그것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헤롯은 자기 호기심을 한 사람의 생명과 인격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 우리는 우리의 호기심을 예수님께 바쳐야 한다.

 

4) 두 강도(23:39~43). 두 죄인은 같은 십자가를 보고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이 장면은 구원의 두 측면 즉, 우리가 대쟁투의 한쪽 편이든지 아니면 다른 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

예수님을 구주로 깨달은 강도는 구원의 편에 섰지만, 예수를 단순한 사람으로 본 강도는 예수를 욕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는가? 똑 같은 사람으로서 모본이라고 보는가 아니면 우리의 생명의 주님으로 믿는가?

 

<부가설명> 우리 앞에는 매일매일 예수님 앞에서 나의 사상과 태도와 의견을 결정해야 하는 일이 연속된다. 우리는 바울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자아가 죽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받아 일어나야 한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두 무리로 나누는 표준이다. 그분을 구주로 믿는 사람과 인간 모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을 사람의 모본이 되는 분으로 생각하고 그분이 살아간 방식대로 나도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이 똑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다. 일찍 시므온은 이 사실을 예언했다.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2:34)라고 한 것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사람은 흥하는 사람이고 예수님을 단순히 우리의 모본으로 보든지 또는 예수님을 전혀 믿지 않든지 그런 사람들은 패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두 무리로 갈라놓는 표적이 된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의 십자가는 대쟁투에 개입되어 있는 모든 사람을 믿음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아니면 불신과 거역으로 반응하는 사람으로 나누었다.

 

 

넷째 날() 그가 부활하시다

62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14).

 

일요일 이른 아침, 여인들은 단지 장례 절차를 마치기 위한 목적으로 무덤에 갔다. 예수님과 함께했던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진실로 알지 못했다. 그들은 무덤이 비어 있고, 하늘의 사자로부터 그분이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24:6)는 말을 들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사도행전의 초반 몇 장에만도 예수님의 부활을 언급하는 부분이 최소한 여덟 군데 있다(1:22, 2:14~36, 3:14~15, 4:1~2, 10, 12, 33, 5:30~32).

 

1. 예수님의 부활이 사도들의 설교나 초기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으면 구원이 성취되지 않는다.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부활한 사실이야말로 복음의 중심이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이었다. 그들은 달려가 이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알렸지만 그들을 믿는 사람이 없었다(24:11). 오히려 사도들은 구속사에 있어서 이 역사적인 소식을 슬픔에 잠겨 지친 여인들의 허탄한 소리라고 무시하였다(10~11). 그러나 그들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구속 행위와 우리의 신앙 그리고 기독교 전체의 바탕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고전 15:14)이라고 말하며 이 점을 분명히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우리의 것으로 약속된 소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소망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여기서 영원히 끝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은 무덤에서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 역시 무덤에서 끝나지 않으리라는 큰 약속을 주셨다.

만약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지 않았다면,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기나긴 구속 행위의 과정은 무덤이라는 막다른 길에서 끝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 결론은 죽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있는 신이라고 확신할 수 없게 되고, 믿음의 대상이 생명의 주로서 자신을 변호하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은 의미 없게 된다. 그리스도가 정말 죽은 상태라면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가장 높은 최종적인 자기 계시와 더불어 무덤에 묻히게 된다.”-George Eldon Ladd,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Wm. B. Eerdmans, 1974), p. 318.

 

<부가설명> 나는 성경을 강론하면서 회중들에게 물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피 흘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지 않았으면 우리의 속죄가 성취되었을까요?” 회중들은 잠시 조용하더니 그렇지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다시 물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기만 하고 부활하지 않았어도 속죄가 성취되었을까요?” 회중들은 잠시 혼란에 빠진 것 같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조그마한 소리로 반문이 나왔다. 나는 웃으며 고린도전서 15:17을 읽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그리고 다시 같은 질문을 했다. 그때서야 회중들이 예수님 부활하지 않았으면 속죄가 되지 않네요. 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속죄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지는 줄 착각하고 있다. 속죄는 예수님의 부활로 완성된 것이다. 만일 예수께서 부활하지 않았으면 고전 15:18대로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이다. 부활이 없었으면 예수교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도행전은 부활증거행전이다. 우리는 복음을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복음은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얻는 것이다.

 

교훈 :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바탕이며 핵심축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헛되며 소망도 사라진다.

 

 

다섯째 날()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625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24:44).

 

그리스도의 부활 직후의 사건들에 대하여 기록한 눅 24:13~49을 읽어 보라.

 

1. 여러 사람과의 접촉에서 예수님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시키기 위해 제시하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오늘날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 성경말씀을 제시하여 가르치셨다. 오늘도 동일한 신앙원리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메시아 왕권을 성립시키는 충분한 증거가 되어야 했다. 예수님은 끔찍한 폭행을 당하신 뒤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분의 시신은 천으로 싸여 무덤 안에 보관되었다. 만약 일부의 터무니없는 주장처럼 그분이 십자가형을 받고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면 분명히 피투성이가 되어 무덤에서 비틀거리며 나오셔야 했을 텐데 그런 모습은 모두가 생각하는 승리의 메시아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과 적어도 몇 킬로미터를 걸으실 수 있을 만큼 강건하셨다. 심지어 자신의 정체를 알리시기 전에 그분은 그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리키며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고취시키기 위해 견고한 성경적 기초를 제공하셨다.

그다음 그분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육체를 보이시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드셨으며 그들에게 성경 말씀을 상기시키셨다.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24:46~48).

예수님은 성경을 인용하여 자신이 살아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셨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제자들이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부활을 만민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과 직접적으로 결부시키셨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들이 많지만 그분은 언제나 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향하게 하셨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어떻게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는 부름과 사명을 알 수 있겠는가? 심지어 복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하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부활하신 자신을 친히 밝히시고 부활한 자신을 보이시면서 자신의 부활을 확인하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 두제자의 집에 이르기까지 모세와 선지자와 모든 성경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설명하셨다. 이 설명 시작하시기 전에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24:25)라고 책망하셨다. 선지자들의 말한 것을 더디 믿는 자들, 곧 성경의 기록을 더디 믿는 것을 지탄하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집에 이르러 식사를 할 때에 축사하셨다. 그때 그 제자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는데 그들 앞에서 사라지셨다. 야속한 장면이 아닌가? 한바탕 포옹하고 감격을 나누면 좋지 않았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사라지셨다.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봐야 믿게 되는 신앙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일 그랬다면 오늘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체를 봐야 믿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오직 성경, 성경만이 우리 믿음을 바르게 이끄는 유일의 도구이다. 그래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친히 만나야 한다. 그것이 생명이다.

 

교훈 : 부활은 예수님의 정체를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였지만 그분은 제자들이 성경 말씀을 기초로 그 의미를 이해하기 바라셨다.

 

 

여섯째 날() 더 깊은 연구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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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깊은 뜻을 알게 될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없이는 하나님의 낙원에서 집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높이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천사들도 그리스도께 존귀와 영광을 돌린다. 왜냐하면 그들도 하나님의 아들의 고난을 보지 않았더라면 안전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효능으로 하늘의 천사들이 배도하지 않게 될 것이다. 십자가 없이는 그들도 사탄이 타락하기 전의 천사들보다 더 안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천사의 완전은 하늘에서 실패하였고 인간의 완전은 축복의 낙원 에덴에서 실패하였다. 지상에서나 하늘에서나 안전을 원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의 어린 양을 바라보아야 한다”(화잇주석, 3:14~1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완전히 증명할 수 없고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 것들을 믿어야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며 살아갑니다. 예를 들면, 과학의 영역에서 어떤 저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요약컨대 우리는 우리가 고수하는 믿음 가운데 극히 일부에 대해서만 직접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다.” - Richard DeWitt, Worldviews: 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and Philosophy of Science, second edition (Chichester, West Sussex, U.K.: John Wiley and Sons, Ltd., 2010). p. 15.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들에 대하여 여러 좋은 근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대위임사명(the Great Commission)을 보십시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24:14). 예수님이 이 말씀을 주신 시점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그분을 따르는 무리는 얼마나 컸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분이 누구신지 앞으로 무엇을 이루실 것인지 이해하고 있었습니까? 또한 초기 교회가 수 세기 동안 로마 제국 안에서 겪어야 했던 수많은 반대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의 이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 예언인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게 하는데 어떻게 도움을 주는지 토의해 보십시오.

오늘날 이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교의 상태는 성경 예언이 확실하다는 또 하나의 강력한 증거이다. 성경은 진실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위의 엘렌 G. 화잇의 인용문을 묵상해 보십시오. 이 글은 죄의 문제가 정말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을 줍니까?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천사들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죄는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창조해주신 존재와 생명을 포기해야 한다. 천사들이 루시퍼의 제안을 언제든지 받을 수 있는 처지였지만 십자가로 그 모든 것이 차단되었고 루시퍼의 주장이 완전히 거짓이라는 것이 폭로되었다. 그러므로 온 우주가 안전하게 되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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