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기사에는 사실 엄살이 약간 섞여있습니다. 리카르도 무티 같은 위대한 예외들이 있긴 하지만, 마초적 카리스마는 이미 남성 지휘계에서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대신 기민하고 민첩한 지휘자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지요. 이를테면 지휘자 역시 '람보의 시대'에서 '제이슨 본의 시대'로 변한 것입니다.
성시연 지휘의 서울시향 연주회에 다녀왔습니다. 협연곡인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윤디 리의 빛나는 음반과, 그에 조금은 못 미쳤던 실황으로도 친숙하지요. 음표가 숨은 복병처럼 마구잡이로 튀어나오는 이 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를 보고 있으면, 정글 탐사나 전자 오락을 보는 듯 우리 마음도 더불어 조마조마해집니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피아니스트 알렉산드르 가브릴뤼크는 '피아노 정글' 탐사로도 모자란지 '왕벌의 비행'을 앙코르로 보탭니다. 이 비행도 쏘이면 아플 듯 강력합니다.
이날 최고의 찬사는 단연 지휘자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지난 서울시향과의 '전람회의 그림'(무소르그스키)이나 '합창'(베토벤) 연주에는 실망도 없지 않았지만, 네 번째 타석만에 통쾌한 안타를 터뜨린 듯했습니다. 드디어 악단과 지휘자가 화학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일까요. 복잡다단한 관현악을 명쾌하게 정리하는 지휘는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뉴욕 필의 부지휘자 시안 장도 그렇지만, 젊은 여성 지휘자의 지휘는 시원시원하고 박력 넘치기 그지 없습니다. 이들의 '젊음' 때문일까요, '여성'이라는 점 때문일까요. 괜스런 궁금증입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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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여성 음악가 나디아 불랑제(Boulanger·1887~1979)는 애런 코플런드와 엘리엇 카터, 필립 글래스와 피아졸라 같은 20세기 최고의 작곡가뿐 아니라 다니엘 바렌보임 같은 명(名)피아니스트까지 길러낸 당대 최고의 음악 스승입니다. 작곡가 윤이상도 불혹의 나이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면서 불랑제를 만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부풀었지요. 불랑제는 뉴욕 필하모닉과 보스턴 심포니,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 세계 명문 악단을 처음 지휘한 여성 지휘자로도 유명합니다. 그래서 '마드무아젤(Mademoiselle)'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지요.
하지만 객원 지휘자가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책임지는 상임 지휘자나 음악 감독은 여전히 '금녀(禁女)의 벽'이 높았습니다. 지휘자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와 협상하는 정치가인 동시에 민간 기업이나 개인의 후원을 유치하는 경영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 보니 음악적 역량과는 관계없이, 여성 지휘자에 대한 진입 장벽이 높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 서울시향을 지휘하는 여성 지휘자 성시연(왼쪽)과 볼티모어 심포니의 지휘자 마린 알솝.
독일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인 시몬 영(Young·48)은 1993년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한 첫 여성 지휘자에 이어, 2005년에는 빈 필하모닉의 156년 역사상 처음으로 지휘대에 오른 여성이라는 기록도 갖고 있습니다. 빈 필하모닉은 여성 단원조차 받아들이기를 꺼릴 정도로 보수적이고 남성중심적 문화로도 악명 높았습니다. 최근에는 고(古)음악 분야에서도 프랑스 출신의 에마뉘엘 아임(46)이 자신의 바로크 악단 '르 콩세르 다스트레'를 이끌고 헨델과 몬테베르디의 작품을 의욕적으로 녹음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서도 지휘자 성시연(34)이 2007년부터 보스턴 심포니 부(副)지휘자를 맡으며 세계 여성 지휘자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성씨는 게오르그 솔티 국제 콩쿠르 1위와 말러 국제 콩쿠르 1위 없는 2위에 입상했으며, 서울시향도 꾸준하게 방문하고 있습니다. 오는 4월 보스턴 심포니의 정기 연주회에서 처음 지휘봉을 잡고, 내년에는 스웨덴 스톡홀름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글룩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로 오페라 무대에도 데뷔할 예정입니다. 여성 지휘자들이 음악계의 마초적 카리스마를 걷어내길 기대합니다. /김성현 기자 danpa@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