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의 이유 ․ 12
-조병화
깊이 사귀지 마세
작별이 잦은 우리들의 생애
가벼운 정도로
사귀세
악수가 서로 짐이 되면
작별을 하세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세
너만이라든지
우리들만이라든지
이것은 비밀일세라든지
같은 말들은
하지 않기로 하세
내가 너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어디메쯤 간다는 것을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작별이 올 때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사귀세
작별을 하며
작별을 하며
사세
작별이 오면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악수를 하세
-제11시집 《공존의 이유》1963. 6. 30)
<감상의 길잡이>
조병화의 일관된 주제는 '인간의 근원적 고독'이다. 그의 시에 나타난 화자는 항상 고독한 나그네의 모습이다. 그 나그네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정처없이 떠돈다. 이웃과 헤어지고,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며, 언젠가는 마침내 이 세상도 떠날 것을 예감한다. 그는 이 세상 일에 집착을 버리면서 항상 떠날 것에 대비한다. 그것은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사리를 깊이 통찰한 결과이다.
시인은 시『헤어지는 연습을 하며』에서 보여 주듯이, 이 시에서도 이별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슬픈 것이다. 이별할 때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깊은 정을 끊어야 하며, 미리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제1-7연에서는 '헤어짐'에 대비해서 부담스러운 사랑, 깊은 관계를 갖지 말고 가벼운 교재를 하며 지내자고 한다. 여기서 '헤어짐'은 남과의 헤어짐일 뿐만 아니라, 자신과의 헤어짐, 곧 죽음을 뜻하기도 하는 이중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제8-11행에서는 내가 상대방을 깊이 생각하고 사랑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아무리 얘기하고 싶어도, 아무리 내 속을 보여 주고 싶어도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의 시『남남 30』에서 보이듯이 '너와 나의 깊은 외로움은 너와 나를 모르게 할 뿐'인 관계, 즉 남남 관계인 것을, 그리고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제12-14연은 운명적인 그 날, 공존이 끝나는 날, 이별의 슬픈 날의 모습이다.
서로 냉정한 표정으로 삭막하게 지내는 오늘의 우리 삶을 되돌아볼 때, 우리 고독한 인간은 고독을 덜기 위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필요하며,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함께 공존해야 하는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깊은 사랑을 하지 말자는 말은 오히려 사랑에의 갈망을 역설적으로 절규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