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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dalkeun.JPG


욕실 바닥에 어머니(장모)가 쓰러져 계셨다. 세면기는 부러져 있고 깨진 유리컵 조각이 타일 위에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데 어머니의 발에선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잠작컨대 욕조의 물을 떠먹으려고 들어왔다가 미끄러지신 것이었다. 치매 어머니가 하루 종일 집안에서 저지를 수 있는 사고는 정말 무궁무진했다. 무슨 요구든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볼 때까지 조금도 고집을 꺽지 않으셨다. 시도 때도 없이 약을 달라, 밥을 달라, 어딜 가자고 졸라댔고, 아내를 그림자 처럼 쫓아다니며 같은 말을 반복하고, 계단에서 구르고, 집을 잊어버리고... 

어머니를 모시고 오던 날, 명절 끝이라 밀리는 차안에서 어머니는 안절부절하셨다. 몇 초 간격으로 "언제 도착하니?"만 연거푸 말씀하셨다. 1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꼭 막힌 차안에서 그것은 정말 고문이었다. 

'아, 이거 판단착오 아닐까?' 

집에 도착도 하기 전부터 두통이 밀려왔다.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처음부터 우리 집에 모셔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주 쉽게 결정했다. 치매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효도다운 효도를 한번 못해봤으니 어머니를 모셔오자. 어머니가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는가. 어머니의 힘든 마지막 인생에 우리가 동반자가 되어 드리자....' 

구구절절 바른 말로 아내를 감동시켰다. 뇌성마비인 딸아이도 기르는데 치매 어머니쯤이야, 더구나 밖에서 장애인 선교도 하는데 어머니를 모시는 일은 당연히 내가 너서야 할 일 같았다. 그러나 잠시라도 눈을 떼면 폭발물처럼 사고를 터뜨리는 어머니를 향한 내 인내심은 곧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까닭을 모르는 몸살로 앓아 누웠던 그날, 어머니와 나는 단 둘이서 집에 남겨졌다. 아내는 초록이를 데리고 재활원에 갔고, 작은 아이 단비는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머리는 터질 듯이 아프고, 손가락, 무릎 여기저기 뼈마디가 욱신거리니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어머니는 언제나 아내가 집에 없으면 안절부절 어쩔줄 모ㄹ라하시는데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초록 아빠, 초록이 엄마 언제 와?" 
"다섯 시에 와요." 
어머니는 시작하신 말씀을 중단하실 뜻이 없어 보였다. 한번 물으신 후에 1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물으셨다. 먼저 물으신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었으리라. 
"초록이 아빠, 초록이 엄마 언제 와?" 
"다섯 시에 와요." 
겨우 대답했다. 그리고 또 다시 이어지는 같은 질문, 어머니께 쉬지 않고 대답해 드리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너무 힘이 들어 대답을 안 하니 어머니는 한가지 행동을 덧봍이셨는데 그것은 손가락으로 나를 찌르며 다시 묻는 것이었다. 몸살로 삭신이 쑤시는데 어머니가 이렇게 나오시니 결국 어머니의 물음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어머니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말로 같은 대답을 계속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그 쉬지 않고 말씀하시는 힘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곧 지쳐서 대답할 힘이 다 떨어졌다. 귀찮기도 하고 짜증도 났다. 나는 손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초록이 아빠, 초록이 엄마 언제 와?" 
나는 손가락 다섯 개를 펴서 어머니께 보여 드렸다. 
"다섯 시?"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초록이 아빠, 초록이 엄마 언제 와?" 
"... ..."(손가락 다섯 개만 편 채) 

정말 짜증에 머리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하루종일 아내는 이런 어머니의 성가심을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끝도 없이 대화가 계속될 즈음 퍼뜩 한가지 샌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내가 어떻게 기도하니?" 
"어머니는 기도하실 수 있어요. 사위가 몸살로 머리도 아프고 몸도 쑤셔요. 그러니 어머니께서 제 손을 잡으시고 하나님께 기도해 주세요." 

어머니는 잠시 나를 빤히 보시더니 입을 여셨다. "하나님 아버지, 초록이 아빠가가 감기 몸살로 머리도 아프고 몸도 쑤셔서 약을 먹었는데 약효가 있어서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어머니의 짧은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터져버린 눈물샘은 좀처럼 마를 줄 몰랐다. 어떻게 어머니의입에서 그런 기도가 튀어 나왔을까. 분명 하나님은 그 순간 어머니를 만져 주신 것이었다. 내가 울기 시작하자 어머니도 따라 우셨다. 

"어머니 죄송해요." 
"무엇을??" 
"제가 어머니 미워했잖아요. 제가 어머니를 미워했어요." 
"그때 뿐이야." 
"어머니를 먼 곳으로 보내려고 했어요." 
"괜찮아." 
"어머니를 밀어서 다치게 한적도 있잖아요." 
"그때 뿐이야" 
"어머니, 제가 밉지요." 
"아니야, 좋아." 
"어머니, 다시는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을게요." 
"고마워."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감출 수 없는 울음을 꺼억 꺼억 토해내고 말았다. 

솔직히 그 동안 나는 어머니를 사랑하는 척하며 새월을 보냈었다. 어머니를 향해 나는 고난이도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듯했으나 결국 화를 내고 짜증 썩인 원망을 계속 터뜨려왔다. 그리고 밖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위선으로 가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여전히 그럴듯하게 폼만 잡고 살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어머니를 만지신 후로 어머니는 이전의 모든 언어들을 잃어버리시고 처음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새로운 언어를 토해내셨다. 

'기뻐요. 좋아요, 행복해요, 사랑해요. 하나님 감사해요...' 
어머니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가실 때까지 아름다운 그 언어를 잊지 않으신 채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어머니는 치매의 밭에 숨겨진 보화였다. 치매 어머니가 보화라는 걸 발견하고 깨닫기까지 분명 값을 치러야 했지만 고통이 없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고통이 행복의 거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낮은 울타리 2007년 5월 200호 기념호에 실렸으며 2002년 6월호 특집 '사랑하는 가족의 이름 앞에서'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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