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

by 관리자 posted Mar 08,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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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선교의 문이 열리지 않았을 때 가장 먼저 들어온 선교사는 귀츨라프, 토마스 선교사였고, 쇄국정책이 풀리면서 가장 먼저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는 알렌이었다. 그 뒤를 이어 아펜젤러, 언더우드, 그 뒤를 이어 스크렌턴, 존 헤론 선교사가 들어왔다. 이들이 서울을 밟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편으로 인천 제물포 항에 도착해야 했다. 1885년 4월 5일, 제물포 항에는 일본을 출발해서 부산을 경유하여 들어오는 배가 있었다. 그 배에는 뮐렌 도르프와 고위관직에 있던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당시 초대 미국 공사였던 폴크가 마중을 나왔고, 알렌 선교사도 선교사들을 맞이하려 제물포 항에 나와 있었다.


배가 정박하여 사람들이 육지로 나올 때, 폴크 공사는 낯선 세 명의 서양 사람들을 발견한다. 바로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였다. 그들을 본 폴크 공사는 화를 내며 입국을 단호히 거절한다. 

"목사님, 당장 돌아가십시오. 이곳에는 아직 선교의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여자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 전에 당장 돌아가십시오."
  아펜젤러의 부인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막상 이렇게 난처한 일을 당하게 되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조정의 신임을 받고 이미 제중원을 맡고 있던 알렌은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여자는 조선에 입국할 수 없다는 최종 결론이 내려졌다. 결국 아펜젤러 부부는 제물포 항에서 입국을 거절당하여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언더우드는 총각이니까 그만이라도 병원에서 일할 수 있게 도와 주세요."
"아니 도대체 병원에서 목사를 데려다가 뭐에 쓰려고 하십니까?"
"어디 할 일이 없어서 못하겠습니까? 정 할 일이 없으면 약봉지라도 싸고, 환자들도 나르고 하면 되지요. 제발 병원에서 일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결국 폴크 공사는 알렌에게 절대로 포교 활동은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언더우드의 입국을 허락했다. 이렇게 해서 아펜젤러 부부는 하는 수 없이 일본으로 돌아가고, 총각이었던 언더우드만 알렌과 함께 제중원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언더우드에게 조선 사람들을 섬기는 일은 그에게 떨어진 최고의 미션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찾아온 이 조선 땅에서 복음을 전할 방법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26세의 젊은 선교사 언더우드는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이 민족을 위해 그저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친구 아펜젤러는 조선 입국도 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쫓겨나고, 선교사로 왔지만 막상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암담한 상황 속에서 그는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문을 올렸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만 같습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 한 이 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한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그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코배기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 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언더우드가 처한 환경을 보면 낙심뿐이었다. 선교의 문도 열리지 않고 같은 미국인 마저도 그를 조선에서 쫓아내려고 하는 상황이었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가 간직했던 것은 오직 믿음뿐이었다.


 

조선의 조정은 선교사들의 포교 활동을 철저히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할 수 있었던 사역은 의료 사역과 교육 사역이었다. 그래서 의사로 온 선교사들은 병원 사역을, 의사가 아닌 선교사들은 교육 사역을 시작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제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다가 부모 없는 거리의 아이들을 데려다 새롭게 고아원 사역을 시작했다. 1886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시작한 고아원은 영국식 고아학교 형태로 운영되다가 '예수교학당'이라 이름하고, 학비는 물론 의복과 음식까지 주면서 아이들에게 한글과 성경 등을 가르쳤다. 이는 후에 '구세학당'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01년에 연동으로 자리를 옮겨 '경신학교'라 불렀다. 이 학교에서 출신 중에는 김규식 박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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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는 한국 선교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선교사이다. 선교 초기 그의 흔적이 묻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그는 한국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양화진 언더우드가의 가족 묘역에는 4대에 걸쳐 모두 7명이 묻혀 있다.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26세의 나이로 한국에 들어왔다. 당시 기독교 전파가 불법인 상황에서도 언더우드는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는 북한지방으로 여러 차례 전도여행을 가서 그 곳에 있던 많은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당시 세례 신청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은, 로스 선교사와 한국인들에 의해서 만주에서 번역된 신약성경이 북한지방에 두루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언더우드는 8살 연상의 릴리아스 호튼과 서울에서 결혼하였는데, 이들은 신혼여행조차 전도여행으로 다녀올 정도로 선교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다. 언더우드는 의주에서 세례문답을 통과한 33명의 남자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서 만주 땅에 가서 세례를 베풀었다. 이들 신혼부부는 1600Km 이상을 여행하였고 600여명 이상을 치료하였다. 


언더우드는 미국으로 돌아가 안식년 기간을 보내는 중에도 강연과 신학교 방문 등을 통해서 직접 후배 선교사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역할을 하였다. 에비슨, 무어, 레이놀즈, 테이트, 리 등이 언더우드의 영향으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국선교사로 올 수 있었던 것은 언더우드 타자기의 소유자이던 언더우드의 형 (존 토마스 언더우드, John T. Underwood)이 재정을 지원한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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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는 초대 성경번역위원장을 맡은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위원장으로서의 그 책임을 다 하였으며, 한국에 오게 될 선교사와 외국인들을 위해서 손수 영한사전, 한영사전, 한국어문법서들을 만들어 직접 출판하기도 하였다. 언더우드는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 교회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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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는 '조선기독교대학'(나중에 세브란스 의대와 합해져서 연세대학교가 됨)를 설립해서 초대학장을 맡는 등 한국 대학교육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언더우드 2세는 아버지를 이어서 조선기독교대학의 3대 교장으로 학교의 발전에 공헌하였고 한국전쟁 중에는 미군민간고문으로 일하였다. 그리고 언더우드 3세도 연세대학교의 교수와 이사로 봉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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